제목 [제30회 한터 백일장] 작문 심사평 & 수상작
작성자 센터지기 등록일 2023.10.31
제30회 한터 백일장 작문 부문 심사평 & 수상작


심사평

작문 제시어 중에는 해당 시기 유행하는 문화 코드를 반영한 것들이 있습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 대박 흥행을 이끈 영화, 시청률 신기록을 세운 드라마, 전국민이 따라 부르는 노래 가사, 유행어, 신조어 등이 이런 유형에 속하는 제시어들입니다. 이번 백일장 제시어는 최고 수준의 화제를 모은 나는 솔로(solo)’라는 방송 프로그램 제목이었습니다. 방송 프로그램에 국한해서 글 아이디어를 내라는 제시어는 아니었기 때문에 솔로라는 단어의 뜻에만 치중해서 쓰는 방식도 괜찮고, 실제 응모작들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최우수작은 성취 중독자인 내가 정리하는 솔로선언문입니다. 성취를 신봉하는 핵개인의 시대에서 원자화한 개인이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 또는 연애까지도 다 곁가지로 취급하는 돌연변이가 되어버린 현실을 1인칭으로 고발(또는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도록 하는 요소도 많고, 몰입감 있게 읽히는 힘도 강한, 잘 쓴 글입니다.

우수작 1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고양이가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내몰리는 상황을 묘사한 글인데, 인간사회를 풍자하려는 글쓴이의 시도가 일정 수준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수작 2솔로 라이프라는 트렌드가 2045년까지 이어진다면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문인데 흥미롭고 자연스러운 이야기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우수작 3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랑은 과시적 재화이며 연애는 시장의 포섭 대상이 되는데, ‘나는 솔로역시 그런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통찰의 차별성이 뛰어난 글입니다.

작문 백일장에 응모해준 모든 준비생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20241월 제31회 백일장에서 또 만나면 좋겠습니다.


최우수작 (정수연)

나는 솔로다. 혼자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혼자여야 할 이유만 있을 뿐. 적어도 나에게 삶은 혼자 살아내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나만의 삶. 삶이란 도전이었고 열망으로 쟁취하는 것이었다. 내 세상은 온통 나 뿐이어서, 어느 누구도 나를 제어할 수는 없었다. 성취에 취하고 성과에 죄이며 나만이 나를 통제한다. 스스로를 통치하기란 때로 갑갑하지만 대체로 짜릿하다. 나는 바라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으며 또 그래야만 했다. 잠시 방황해도 결국 성공이라는 하나의 결말 뿐이다. 사랑놀음도 결국에는 휘발될 무엇이기에 별 의미는 없는거다. 그래, 나는 내가 사랑하기로 한다. 결기 가득한 솔로 선언을 받아든 당신. 당신은 나와 다른가?

나는 성취 중독자다. 해내는 것 외에는 다 부수적인 거다. 한 번 사는 인생 멋지게 살다 죽어보겠노라! 이 다짐은 거기서 시작된다. 중독된 이들에게 주변은 자주 흐릿한데, 내 삶의 중심이 나라면 가족, 친구, 애인. 그런 것들은 다 곁가지일 뿐이다. 결국 그들도 찰나의 순간을 위한 부재료일 뿐. 누구도 간섭하지 못하게 앞만 보고 달린다. 그렇게 경주마처럼 달리다 연애라는 당근을 낚아채도 보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또한 수많은 성취 항목 중 하나일 뿐이다. 감정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지긋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순간의 쾌락만 난사한 채 홀랑 떠나버린다. 결국 다시 혼자로. 세상에 나를 더 오래 각인시킬 무엇으로 상실을 메운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유별난 종자로 태어나 유별나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안타깝게도 나만 돌연변이가 되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곁가지라며 흐리게 봐오던 주변을 돌아보니 나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던거다. 누구의 간섭도 원하지 않는, 오직 나만을 위해 숨쉬는 사람들. 주변이 온통 였다. 사회도 세상도 내가 존재할 때까지만 유의미하다는 극단의 이기주의. 세상의 흥망에는 관심 없다. 그저 내 한 몸 지켜내기가 유일한 과제다. 세상은 자주 상처를 호소하지만 그걸 돌봐야 할 이유도 여력도 없다. 어린아이 울음소리 없이 사회는 조용히 늙어가고, 인류의 터전이 되어준 푸른 행성의 미래마저 불투명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이 솔로 선언이 너와 무관하다 말하겠는가. 나는 너였고 너는 곧 나였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너는 자꾸만 혼자가 된다. 시간과 노력을 다른 누구에 내어준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내 삶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혹자는 말한다. 자주성을 좇아 성취를 신봉하는 핵개인의 시대. 가족의 분리를 넘어 이제는 더 개인화된 개인들이 그 욕망을 표출하며 시대를 주무른다고 말이다. 당부하건대 부디 우리를 탓하지 말기를. 자꾸만 해내기를 주문해온 건 아마도 사회였을테니. 개인의 희생은 등한시하면서 주문만 늘어놓는 사회가 결국 우리를 갈라 놓았을테니. 그 명분으로 사회의 아픔을 당당히 외면한다. 그렇게 홀로 거울 앞에 선다. 혼자가 된 우리가 보인다.


우수작1 (손세일)

나는 솔로다. 그래서 매일 밤 울음소리를 내며 짝을 찾는다. 야옹야옹. 노란색과 하얀색 털 배합이 적절한 게 매력인 수컷 ‘치즈’가 교미하자고 말을 건다. 흥, 내가 그렇게 쉬운 암컷 같아? 뒤꿈치를 들고 콧수염을 활짝 펼친 상태에서 고혹한 눈매로 바라보다 마음을 주기로 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시작한 우리 둘에겐 크나큰 관점 차이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이라는 종족에 관한 생각 차이다.

우리를 언제 해칠지 모르는 인간을 경계하는 나와는 달리, 치즈는 “개냥이” 소리를 들으며 스스럼없이 그들에게 다가간다. 사료나 ‘츄르’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그렇게 사냥도 하지 않고 음식을 받아먹기만 하다가는 우리의 ‘야생성’을 잃어버릴 거라고, 고양이는 고양이다울 때가 가장 멋진 거라고. 치즈에게 여러 차례 경고해도 이미 다른 관점 차이는 바뀌지 않았다. 차라리 다르기만 했어도 괜찮았을 터다.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할 줄 아는 고양이 사회이기만 했다면.

치즈가 이틀째 보이지 않았다. 흥, 권태기가 온 건가? 쥐나 갖고 놀면서 시름을 잊기로 했다. 선홍빛의 길쭉하고 가느다란 꼬리, 이 얼마나 매혹적인 존재인가! 고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 멀리서 치즈가 다가왔다. 귀 한쪽 일부가 잘린 채로, 가랑이 사이 있었던 땅콩도 사라진 채로. 치즈는 눈에 초점이 없는 깡통이 됐다. 밤에 시끄럽다는 이유로 인간이 고양이를 데려가 ‘중성화 수술’이라는 걸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그들은 어째서, 무슨 권한으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있는 것인가?

그때부터 고양이는 고양이대로 살자, 야생성을 잃어버리지 말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 고양이 사회를 위해서. 단기적으로는 사료를 받아먹을 수 있는 지금이 편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 마음이 언제 돌변할지는 모른다! 여우나 독수리 같은 천적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먹이를 스스로 찾을 수 있는 역량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인간으로부터 벗어나자! 외치는 순간에 돌이 날아왔다. “반인주의자! 빨갱이!”, “고양이 사회 존속을 위협하는 반고양이 세력”. 나를 모함하는 날선 언어들이 귀에 꽂힌다. 고양이를 위한 행동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던 것인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핍박에 나와 함께 행동하던 이들도 떠나간다. 나는 정말로 혼자가 돼가는 중이다.


우수작2 (최다희)

5...4...3...2...1....
딸깍딸깍딸깍딸깍딸깍. 사무실 책상 곳곳에서 들리는 마우스 소리가 꼭 총성 같다. <2045년 제2차 '나는 솔로' 주택 청약 신청>. 아파트 이름은 언제나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는 법. 요즘 강남의 유명 아파트엔 ‘솔로’, ‘싱글’이란 단어가 꼭 들어간다. 이웃 동네는 아파트 브랜드명이 세련되지 않다며 ‘솔로파크뷰’로 이름을 바꾸자는 주민 서명이 한창이란다. 기존 단지 이름에 ‘솔로’란 택갈이를 하면 시세가 껑충 뛴다.

20년이 지났어도 '초품아'의 인기는 여전하다. 달라진게 있다면 아이들 대신 강아지가 등교한다는 점이다. 반려견 교육시설을 낀 아파트 단지는 매번 역대급 청약 경쟁률을 갱신한다. 다른 개들과 어울리며 사회성과 예의범절을 배운 강아지는 확실히 '배운 티'가 난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개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지역사회에 다양한 일을 수행한다. 반려견이 미래인 시대에, 어떤 아저씨가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며 아파트 단지에서 소리치는 옛날 유물 영상은 낯설기만 하다.

한 지붕 네 사람. 할머니가 그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꺼내는 단어다. 네 명씩 모여 살았다니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여기에 할머니 젊은 시절 이야기가 더해지면 숨이 턱 막힌다. 초과근무까지 주 50시간을 넘는 장시간 노동, 아이 탯줄 절단과 동시에 시작되는 경력 단절, 돌봄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학원 뺑뺑이. 행복보다 죄책감으로 지탱되던 그 시절 가족의 모습을 그려본다. "혼자는 외롭고, 둘은 괴롭다"는 옛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할머니는 일과 양육을 저글링하며 얻은 각종 고질병을 달고 사신다. 그리고 볼 때마다 자꾸 했던 말을 반복하신다. "혼자 행복한 게 최고다"

불행을 보고 자란 세대는 홀로 늙기를 선택했다. 솔로 전성 시대가 그렇게 자연스레 찾아왔다. 우리를 향해 혀를 끌끌 차던 어른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결혼과 출산을 끊자 삶에 여유가 찾아왔다. '나만 챙기면 되는 삶'이 이토록 만족스러운데, 합계출산율 0.45란 숫자가 뭐 대수인가. 매일 뉴스에서 심각하게 떠드는 이야기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취업자 평균 연령이 54세가 됐다는 둥, 할머니의 고향이 유령도시가 되었다는 둥. 솔로가 아니었다면 자식이 살아갈 세상을 걱정했겠지만, 난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딱 내가 죽기 전까지만 지구가 온전하면 그만이다. “'나는 솔로' 단지 청약 당첨을 축하합니다.” 평생 운을 다 끌어 썼다. 행복감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끝내주게 늙는 일만 남았다.


우수작3 (한종태)

재생산은 인류 이래 지속되었다. 반면 자유연애가 허락된 역사는 길지 않다. 사랑이라는 세련된 기호로 감춰지지만 결국 연애는 결혼 그리고 재생산과 연결되어 있다. 그 야만성을 이유로 최근 많은 사람은 비혼이라는 이름의 저항을 한다. 재혼에 관대하지 않은 분위기와 미디어가 형성하는 이미지는 현대인의 사랑에 족쇄를 채웠다. ‘나다움’은 불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일부 기혼자는 결혼 후 상대가 변했다는 농담 섞인 푸념을 내뱉는다. 연인과 배우자 사이의 분절은 곧 편안함보다 불편함이 사랑이 된 현대인의 역설이다.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경쟁 사회에서 연애마저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의 발현이다. 또 다른 일탈로 비연애가 등장한다.

자본주의는 이 틈을 파고든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망은 라캉이 정의한 ‘대문자로서 타자’가 된다. 욕구와 성취는 가까워질 때쯤 서로를 밀어낸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갈증을 느끼는 에리직톤이 된다. 끝없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면 시시포스처럼 영원한 형벌에 갇힌다. 결핍을 탐하라는 자본주의의 외침은 저출산, 비혼, 비연애 삼중고의 한국에서 중매 시장 호황을 이끌었다. 사랑만큼 가치 있는 재화가 없다. 데이트 애플리케이션 회사가 대박을 터트리고 방송사는 연애 프로그램을 앞다퉈 쏟아낸다. 좋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어울리는 조건을 따지고, 손쉽게 사람을 만나며, 대가 없는 즐거움을 느끼려는 의도가 더 맞는 해석 같다.

사랑은 과시적 재화가 되었다. 현대인은 소비로 자신을 규정한다. 감정의 모방이 곧 사회의 본질이라 설명했던 가브리엘 타르드라면 사랑이야말로 한국 전체를 설명하는 감정이라 볼 것이다. 그 생태계에서 과거 한 연애 프로그램 참가자가 자살했던 일은 그저 개인의 비극으로 치부된다. 프로그램마다 서로 다른 차별성을 내세우며 연애를 진열한다. 상품이 되어버린 사랑은 시장 경제의 비극이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개인 영역까지 거래가 침투해도 시청자는 불편해하지 않는다. 주어진 상대와 시간을 보내는 ‘랜덤데이트’ 같은 인위적 만남에도 ‘쇼’니까 괜찮다는 핑계 속에서 많은 출연자가 전시되어 ‘과몰입러’들에게 2차 가해를 당한다.

혹자는 연애는 항상 환상이었다고 할지 모르겠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그 예시라고. 혹은 관계 맺기가 더욱 어려워진 세상에서 어차피 지고지순한 사랑이나 정조 같은 게 필요 없다면 이것 또한 괜찮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솔로’는 순수한 ‘진짜’들의 사랑이라고 말이다. 글쎄. 다큐멘터리 제작진을 강조하며 ‘극사실주의’를 내세우는 그 프로그램 속에서 시리즈를 거듭하며 반복되는 캐릭터와 서사는 마치 ‘잘 연출된 시트콤’을 떠올리게 한다. 과장이 심하다면 다르게 질문 해보겠다. 당신은 재미를 이유로 소비되는 타인의 사생활과 아픔에 얼마의 값을 치르고 있는가?